곽재식 – 로봇 공화국에서 살아남는 법 (+140자 소설)

일전에 감상을 쓴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의 작가 곽재식님의 책. 이 책 바로 전에 역시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곽재식님의 140자 소설을 읽었다. 140자의 글자수 제한이 있는 트위터에서 트윗 하나로 완결된 이야기를 만들어 보는 시도를 모아서 책으로 낸 것. 그 책도 꽤 재미있었지만 저자가 뛰어난 이야기꾼이라는 것 외에 길게 쓸만한 감상이 떠오르지는 않아서 여기에 기록만 남겨놓는다.

 

곽재식님의 다른 책들은 대개 SF, 혹은 그와 비슷한 분위기의 소설들인데 이 책, 로봇 공화국에서 살아남는 법은 넌픽션 쪽이다. 어린 시절 컴퓨터를 사용했던 개인의 경험과 과학기술사의 여러 이야기들,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전망이 뒤섞여 있는 교양과학서로 분류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야기는 저자의 어린시절이던 1980년대, 아버지가 사오신 IBM-XT 호환기종 컴퓨터를 처음 만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내 경우 국민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컴퓨터를 만져봤는데, 몇 년 차이는 나겠지만 저자의 경험과 비슷한 기억이 있어 책의 첫 부분을 매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중년 트잉여의 아재감성을 자극하는 한 마디가 있었으니, 바로 전격Z작전 데이비드 핫셀호프의 대사, “가자, 키트.” 였다. 맥가이버와 전격Z작전과 에어울프와…

컴퓨터 게임을 만들어 보려던 저자의 노력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고, 이야기는 요제프 바이첸바움과 엘리자, 컴퓨터의 초기 역사, 튜링테스트 등으로 이어진다. 인공지능이라고 하는 것의 역사가 생각보다 길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20세기 중반 사람을 능가하는 인공지능이 곧 등장하리라던 낙관적인 전망이 물거품이 된 후, ‘인공지능 겨울’을 거쳐 21세기가 되자 기계학습이라는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 무슨 영웅서사 같기도 하다. 스타워즈 에피소드 4, 5, 6 정도에 해당하는?

잠시 책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인공지능에 대한 내 생각. 인공지능이 화제로 떠오른 가장 큰 계기는 작년 초에 있었던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일 것이다. 나는 처음에 이세돌이 이기리라는 전망에 동의하고 있었는데, 1국, 2국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생각을 바꿨다. 바둑에서 컴퓨터가 사람을 이길 수 없으리라던 예전의 생각은 바둑에서 모든 경우의 수를 따지려면 컴퓨터로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은 모든 수를 다 계산하지 않고 이미 알려진 여러 수순들과 바둑판의 형세를 (어떻게인지는 잘 모르지만) 판단하여 상황에 맞는 수를 둘 수 있는, 뛰어난 존재라는 이야기. 그런데 그 인간의 판단력에 대해 좀 고민해 보면, 인간의 모든 속성이 그렇듯이 지구 상의 다른 생명들과 마찬가지로 진화를 통해 만들어졌을 것이 분명하다. 바둑을 둘 수 있는 능력은 잘해봐야 진화의 부산물 정도일 테고, 본질적으로는 기억력과 시행착오를 통해 만들어진 (극히 일부 인물들은 상당부분 타고난) ‘감’을 이용할 것이라 생각된다. 바둑의 심오함..이라든가 인간 두뇌의 탁월함..같은 건 그냥 우리가 모르는 경우의 수가 겁나게 많다는 사실을 마치 인간이 뛰어난 것처럼 포장하기 위해 쓰는 말인 것 같고. 결국은 계산과 예측의 반복인데, 이세돌이 그나마 알파고한테 이길 수 있었던 건 수백년 동안 인간이 시행착오로 알아낸 경우의 수와 ‘감’이 그 시점에서의 알파고보다 나은 경우도 있었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닐까. 최근 업그레이드된 알파고가 온라인 대국 사이트에서 프로 기사들을 상대로 60연승을 거두고 그만둔 것을 보면 바둑에 사용되는 계산과 예측에 있어서는 2016년을 기해 인간보다 인공지능이 더 능숙하게 되었다고 결론내려도 될 것 같다. 바둑, 그리고 그 바둑을 두는 인간의 두뇌 속에 우주의 원리라든가 심오한 그 무엇이 원래부터 장착되어 있었으리라는 생각은 이제 전혀 들지 않는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책의 앞부분도 물론 재미있지만 정말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은 뒤쪽 1/3 정도다. 미래에 대한 전망, 그리고 우리는 인공지능의 대두로 인해 변화하는 사회의 모습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하는 이야기들. 기존에 많이 들을 수 있는 식상한 이야기들이 아니라 곽재식님의 날카로운 통찰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특이점에 대한 생각이라든가, ‘대 바지사장 시대’라는 말이라든가.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읽어보시길.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책장을 넘겼다.

책을 출간한 구픽이라는 출판사는 얼핏 트위터에서 본 바로 1인출판사인 것 같다. 출판계에서 일하시던 분이 독립해서 장르문학을 전문으로 내시는 것 같은데 범상치 않다. 작년에 아작이 SF를 연달아, 꾸준히 내면서 장르문학 출판계의 전면에 부상했다는 느낌? 구픽도 연달아 책들을 출간하는 기세를 보니 만만치 않아 보인다. SF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와 이거 다 사들일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는 날도 오는구나…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이은희 – 하리하라의 과학블로그

하리하라의 생물학 카페로 유명해진 이은희님의 세번째 책. 과학같은 소리하네 팟캐스트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은희님이 출연해서 하리하라의 생물학 카페가 60쇄를 찍었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60쇄… 대단하다. 알라딘에서 이은희의 저서를 검색해보니 60권이 걸려나오는데 중복과 공저를 감안해도 2002년부터 매년 책 한 권 정도 분량의 글은 써냈을 것이다. 글을 꾸준히 써내는 능력과 성실성에 경의를. 홍성욱 교수의 책과 마찬가지로 이분 책도 한 번 읽어야지 하다가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보이길래 샀다.

책을 처음 집어들었을 때는 제목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물학 카페라는 책으로 유명해진 것은 알고 있는데, 생물학 카페도 약간 그런 측면이 있지만 ‘생물학’도 아닌, ‘과학블로그’라고 하면 너무 범위가 넓고 주제가 모호하지 않나.. 싶었다. 찾아보니 살림 출판사의 ‘xx블로그’ 시리즈 중 하나였다. 시리즈의 다른 책들을 보니 경제학, 심리학, 수학, 역사 등을 다룬다. 그래도 ‘과학’은 여전히 너무 넓다. 책 표지의 책 제목 바로 밑에 부제 정도 되는 문구가 쓰여 있다. “현대과학의 양면성, 그 뜨거운 10가지 이슈”. 총 10개의 꼭지들 중 항생제와 유전자 조작 식품 등 생물학 관련 내용이 7개, 다이너마이트, 원자력, 석유가 나머지 3개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면 과학 전체를 고루 다루는 것도 아니잖아.. 체계적으로 과학 전반을 다룬다기보다 비교적 편하게 쓴 블로그의 과학 관련 글들을 묶어 책으로 펴낸다는 정도의 컨셉인 것 같다.

책 전체에 걸쳐 컬러 사진과 그림을 아낌없이 사용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책 표지에 저자 이은희 그림 류기정이라고 삽화를 그린 분의 이름도 같이 올라가 있다.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면서 과학을 쉽게 풀어쓰는, 최대 중고생 정도의 청소년 연령대까지를 주 독자층으로 삼는 책이리라 짐작할 수 있다.

10가지 이슈는 사실 이런 쪽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라면 관련된 이야기들을 굉장히 자주, 심지어는 식상할 정도로 많이 들어왔을 법한 주제들이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이슈들 모두에 대해 자세히 (혹은 대략이라도) 알고 있는 것은 아닐테니 한 번 정리한다는 생각으로 읽어보기에는 괜찮다. 이슈들에 대해 기본적인 정리는 잘 되어있는 편이지만, 깊이라는 측면에서는 아무래도 아쉬움이 느껴진다. 애초에 책의 지향이 그런 쪽은 아니었던 것 같긴 하다. 그렇게 볼 때 엊그제 감상을 적었던 윤신영님의 책이 새삼 훌륭하다는 생각이 든다. 뒤쪽에 실려있는 참고한 사이트/도서 부분도 마찬가지로 아쉬운데, 한국식품연구소, 대한신장학회, 강원대 환경과학과 등 각 장의 내용과 관련이 있는 웹사이트의 대표 URL만 나열한 것이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삽화가 많이 들어가면 책이 쉬워지는가? 하는 것은 언젠가 과학만화를 그리는 김명호님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하게 된 부분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 책에는 사진 뿐 아니라 삽화도 많이 들어간다. 타겟 독자의 연령층이 낮기 때문에 만화풍의 삽화를 많이 넣어서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들려고 한 것 같다. 본문의 내용을 시각적으로 잘 설명하기 위한 과학 삽화도 물론 많은데, 웃음을 주기 위해 넣은 것이 분명해 보이는 만화들도 꽤 있다. 그 중 하나는 책장을 넘기다가 나로 하여금 ‘뭐야? 이 썰렁하고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도 안 되는 만화는.’ 이렇게 반응하게 만들었는데 지금 다시 찾아보려니 어떤 거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과학책은 어렵기 때문에 재미가 없고 웃기는 만화를 넣어서라도 독자의 눈길을 끌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 같은데 글쎄, 책의 내용이 정말 재미가 있고 잘 쓰여졌으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열 페이지의 글보다 잘 그린 한 장의 그림이 내용을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면 그때 삽화를 쓰는 것이 낫지 않을까. 너무 꼰대같은 발언인가.

  • p.17: 페니실리움 노타움Penicillium Notaum: 학명은 (뉴욕타임스에 실을 글이 아니라면) 이탤릭체로, 첫번째 단어인 속명의 첫 글자는 대문자 나머지는 모두 소문자로 표기. 여기서는 전체가 이탤릭체가 아니고, 두번째 단어인 종명의 첫 글자가 대문자로 되어 있다. 그리고 검색을 좀 해보니 노타움이 아니라 노타툼이 맞는 것 같다. Penicillium notatum 으로 표기해야 할 듯. (잘못된 학명 표기만 보면 발동하는 이것은 직업병)
  • p.51: “이론 물리학자 슐레징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슐레징거가 아니라 슈뢰딩거.
  • p.69: “충분한 합의를 거치지 않은 과학의 결과가 사회에 재유입될 때”: 그 과학의 결과는 사회에 처음 들어오는 것일 텐데 “재”유입이라고 표현한 것이 이상하다. 그냥 유입이라고 하는 쪽이 나을 듯.

홍성욱 – 홍성욱의 과학 에세이: 과학, 인간과 사회를 말하다

대한민국 과학학의 권위, 홍성욱 서울대 교수
과학에 대한 역사적, 철학적, 사회학적, 문화적 통찰
“인간은 과학을 만들고 과학은 인간을 만든다”

띠지처럼 디자인된 표지 하단에 쓰여 있는 문구다. 이름은 오래전부터 많이 들었던 분인데 책을 읽는 것은 처음. 어떤 내용의 책들을 쓰는 분인지 무척 궁금했다. 이래저래 과학기술사회학, 그러니까 STS (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혹은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를 좀 들여다 봐야 할 것 같아서 알라딘 중고서점에 갔다가 집어왔다.

알라딘에 등록된 표지이미지에는 띠지처럼 디자인된 문구가 없는 것을 보면 그쪽이 원래 표지 디자인이고 띠지같은 디자인은 정말 띠지로 의도했던 것 같다. 띠지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잠시 해보았다. 임시 책갈피로 쓰기엔 나쁘지 않으나 내 입장에서는 별 필요없는 물건이라는 정도의 생각. 책을 팔아야 하는 마케터의 입장은 또 전혀 다르겠지만.

“지난 몇 년 간 대중매체나 인터넷에 기고한 글, 강연과 토론을 위해 작성한 글을 모아서 편집”했다는 이 책은 모두 네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현대 사회와 과학기술에서는 과학사의 일화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많이 소개된다. 2장 과학과 창의성에서는 창의적인 과학연구는 어떻게 가능한지를 살펴본다. 3장 누구를 위한 과학기술인가? 에서는 광우병, 대운하, 전쟁, 줄기세포 등 여러 주제들을 통해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들여다본다. 4장은 문화, 사회, 역사에 대한 단상들에서는 영화나 연극에 대한 학자로서의 감상 및 기타 등등 성격의 글들이 모여 있다. 2장은 비교적 긴 글들이고 나머지 1, 3, 4장에 실린 것은 모두 5쪽 내외의 짧은 글들이다. 일간지나 주간지같은, 지면의 한계가 명확한 곳에 실은 글이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1장을 읽으면서는 줄곤 ‘이런 이야기들을 왜 쓰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짤막한 글에서 괴테와 뉴턴이라든가, 에드워드 텔러와 이휘소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서술이 지나치게 역사적 사실들의 나열에 가깝고 그에 대한 의미를 설명한다거나 통찰을 준다거나 하는 것이 상당히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중고등학교 시절 역사교과서 보는 느낌에 가까웠달까. 사람 이름이 나오면 바로 뒤에 영문 표기와 생몰연대를 작고 밝은 글씨로 써주고, 주석을 넣을 경우에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내주 처리를 했는데, 이건 일단 가독성을 너무 해치는 데다가 주석이 필요할 경우 일반적으로 각주를 선호하는 내 취향에도 맞지 않았다. ‘이걸 왜 굳이 주석으로 설명하지?’ 하게 되는 경우도 많았고.

1장이 일반인 대상의 컬럼 (과학사 이야기 같은?)이라면 창의성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는 2장은 특정 독자층을 상정하고 쓴 연재물로 보인다. 예를 들면 과학교육과 관련된 사람들이 보는 정기간행물? 웹진?에 실었다든가. 1장보다는 더 재미있고 읽을만하다.

3장은 시의성 있는 컬럼들이다. 아마도 과학기술사회학자가 쓰는 글이라고 하면 이런 글들을 기대하기가 쉬울 것이다. 광우병의 위험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과학적으로 어떤 것이 옳다는 판단이 있더라도 그것을 사회 일반에 전달할 때는 어떤 방식으로 전달해야 하는가, 과학기술은 가치중립적인가, 사회와는 어떻게 상호작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들이 글을 쓸 당시에 이슈가 되었던 소재들을 통해 전달되고 있다. 1장과 마찬가지로 짧은 글들이라서 아쉬움이 많은 편이긴 하다. 광우병이라든가 4대강처럼 다루고 있는 소재들이 그 자체로 책 한 권씩 쓸 수 있을만한 것들이라서.

4장은 앞에서 언급한 그대로 영화감상문을 비롯한 “기타 등등” 성격의 짤막한 글들.

책을 다 읽은 후의 소감: 이런 내용들을 왜 한 권의 책으로 묶었을까? 이렇게 모았더니 책 한 권 분량이 되더라는 이유 외에 뭐 다른 게 있으려나? 하는 꽤나 시니컬한 생각이 들었다. 한 권의 책으로 엮어야 할 당위성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기대했던 것은 2장, 혹은 3장의 내용 일부를 2장의 (비교적 긴 글) 형식에 담아 책 한 권 분량을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홍성욱 교수의 다른 책을 하나 주문해 놓은 것이 있으니 연휴가 끝나면 배달될 책을 기다려야겠다.

아래는 일상적인 지적질:

  • p.26: 영화 <주라기 공원> 의 바람직한 표기가 <쥬라기 공원> 이라는 이야기는 앞의 독후감에서도 했다. 더군다나 여기는 “쥐라기”도 아니고 “주라기”야..
  • p.57: 레이첼 칼슨은 Rachel Carson 일텐데 레이첼 카슨이라고 보통 표기하지 않던가.. 칼슨이라고 하면 Carlson 일 것 같아서. 그러고보니 여기에는 영문이름도 생몰연대도 표기하지 않았네.
  • P.62: 이휘소 박사와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를 얘기하려면 최소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내용이 실제의 이휘소 박사와 거리가 꽤 멀다는 것을 좀 더 명시적으로 이야기해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휘소 박사가 핵무기 개발에 관여했다는 ‘신화’를 만들기도 했다.” 는 애매하게 읽힐 수도 있는 문장 정도로 내버려두지 말고.
  • p.130: “그(폴 새뮤얼슨)는 물리학자들과 만나고 토론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나중에 경제학을 양자역학에 기초해서 바꾸는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매우 이상하게 느껴지는데.. ‘경제학을 양자역학에 기초해서 바꾼다’는 것이 도무지 어떤 것인지 나로서는 짐작이 가지 않는다. ‘너는 양자역학도 경제학도 모르지 않느냐’고 하시면 물론 할 말은 없습니다만. 상자 안에 들어있는 고양이의 가격이 1만원과 0원 두 가지로 중첩되어 있다거나 그런 걸까?
  • p.159: “광우병(BSE)” 이 뭐의 약자인지 몰라서 찾아봤다. Bovine Spongiform Encephalopathy 이라고 합니다.
  • p.192: 어떤 전염병에 대해 “A방법을 사용했을 경우 200명이 확실하게 목숨을 건진다” 와 “A라는 방법을 택하면 400명이 확실하게 목숨을 잃는다” 가 “완전히 같은 상황” 이라고 쓰고 있는데… 아니 그거 같은 거 아니잖아요. 앞의 문장은 나머지 400명이 죽을지 안 죽을지 모르는 거고 뒤의 문장은 나머지 200명이 살지 안 살지 모르는 건데 어떻게 같냐고. 위험에 대한 확률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예를 들고 싶으면 조건부 확률 얘기를 하던가.
  • p.217: 데카르트의 주장으로 알려져 있는, 동물은 영혼이 없는 기계와 같다는 말은 내가 공부를 해보지는 않아서 모르겠지만, 한 번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 후계자들이 파티 장소에서 동물을 잔인하게 죽이면서 즐거워했다는 이야기도 조금 의심스럽고. 왜 그런고 하니.. 17세기에 화석이 생물의 유해냐 아니냐 하는 것을 가지고 과학자들이 논쟁을 벌일 때도 나름 철학적, 과학적, 사회적 맥락이 있었으므로 오늘날 우리가 쉽게 멍청한 논쟁이라고 일축해 버리는 것은 잘못된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과학사와 관련해 과거의 사람들이 바보같은 소리를 한 것처럼 보인다면 정말 그런 것인지를 과거의 맥락에서 다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인데.. 이 페이지의 데카르트와 그 후계자들에 대한 서술은 지나치게 단순해 보인다.
  • p.223: 냉전 시기에 핵전략을 만들다가 모스코바를 방문하고 붉은광장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어울려 노는 것을 보고 울음을 터트린 후 미국에 돌아와 핵무기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모임을 조직해 리더가 된 미국 과학자…의 이름은 무엇인지 매우 궁금하다. 꽤 중요한 인물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이름이 안 나와있지?

P.S. 223.쪽에 언급된 미국 과학자의 행적이 물리학자 테드 테일러와 거의 일치한다고 트친 @luxsecuritatis 님이 알려주셨다. “시민들의 모임을 조직해 리더가 된” 부분만 좀 다른데, 테드 테일러는 퍼그워시 회의(Pugwash Conferences on Science and World Affairs)에 참여했다고 함. https://twitter.com/luxsecuritatis/status/825666290031300611 트윗과 이어지는 글타래 참조. 퍼그워시 회의에 대해서는 https://en.wikipedia.org/wiki/Pugwash_Conferences_on_Science_and_World_Affairs 참조. 그나저나 테드 테일러가 맞다면 이 분, 프리먼 다이슨과 함께 오리온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분이네… @.@

윤신영 – 사라져 가는 것들의 안부를 묻다

과학동아 편집장인 윤신영님의 책이다. 열심히 일하시는 모습을 트위터에서 종종 (특히 마감 때) 엿볼 수 있다. 잡지를 만든다는 것이 보통 바쁘고 고된 일이 아닐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런 와중에도 외부 강연을 한다든가 다른 분 강연에 패널이나 사회자로  참여하는 경우도 꽤 있는 것 같다. 잡지에 실리는 과학기사들의 연장선상이긴 하겠으나 책까지 출간한 것을 보니 무척 부지런한 분이시리라는 짐작을 해본다.

‘사라져 가는 것들의 안부를 묻다’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은 멸종 위기에 몰려 있거나 그 정도까진 아닐지라도 여러 이유로 생존에 위협을 받고 있는 생물들에 대한 책이다. 얼핏 오래된 기억 속에서 더글러스 애덤스가 공동저자로 참여한 ‘마지막 기회’라는 책이 스쳐가는데, 멸종 위기의 생물들을 찾아 떠난 여행에서 더글러스 애덤스가 줄곧 투덜거린 것 같다는 막연한 이미지만 남아 있을 뿐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아 비교를 한다거나 할 수는 없겠고, 멸종 위기의 동물을 다룬 그런 책도 있다는 얘기. 어이쿠.. 찾아보니 내가 읽은 것은 2002년에 나온 최용준 번역본이었고, 그 이후 다른 출판사에서 두 번 냈으나 모두 품절 내지 절판이어서 지금은 구하기 힘들어 보인다.

책은 인간이 박쥐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해서 박쥐가 꿀벌에게, 꿀벌이 호랑이에게, 하는 식으로 의인화된 동물들의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항상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네안데르탈이 인간에게 보내는 편지로 끝난다. 간혹 볼 수 있는 ‘대필자’에 대한 언급을 보면 완전한 의인화는 아닌 셈인데, 과학기자인 저자가 여러 경로를 통해 얻게 된 최신 연구결과 등을 글 속에 풀어내면서 동물의 입장을 전달할 수 있게 해주는 적당한 장치인 듯하다. 편지는 대부분 존대말로 되어 있어서 동물들이 자신의 처지를 구구절절 설명한다거나 하는 부분에서는 손발이 약간 오그라드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교양과학서라는 분류에도 여러 가지 수준의 책들이 있을 것이다. 과학에 문외한인 사람의 관심을 확 끌 수 있을 정도로 재미있고 쉬운 책도 필요할테고, 나름 고급 독자들이 보았을 때 ‘오, 이런 이야기도 있었군!’ 하고 무릎을 탁 칠 수 있을 만큼 여러 분야의 최신 연구결과를 잘 해설해 주는, 학술서와 교양서의 경계부에 위치한 책도 필요할 것이다. ‘사라져 가는 것들의 안부를 묻다’는 대략 중간 정도에 위치한, 형식이나 주된 내용으로 볼 때는 쉽게 읽을 수 있는 편이지만 다루는 동물들에 대해서는 과학계에서 최근 논의된 이슈들까지 놓치지 않고 다루는 균형잡힌 책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박쥐, 꿀벌, 고래, 사자, 네안데르탈인 등 다양한 동물들과 그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 일별할 수 있으면서도 지나치게 인간을 탓하는 교훈적인 어조를 취하지도 않는다. 각각의 동물들에 대해 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책 뒤의 ‘더 읽어보기’에 참고문헌도 준비되어 있다.

사실 읽으면서는 서간체때문인지 저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오글거린다는 느낌을 꽤 받았는데, 다 읽고 나서 곰곰 되짚어 보니 바로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여러 모로 꽤 괜찮은 책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여러 모로 적절하게 균형잡힌 교양과학서적이라고 할까.

몇 가지 눈에 띈 것:

  • 110쪽에 영화 제목이 <쥐라기공원>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지질시대인 ‘쥬라기’의 한글표기는 ‘쥐라기’가 바람직하겠으나 영화 제목은 고유명사로 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 <쥬라기 공원>이 낫지 않을까?
  • 돼지가 고래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다. 고래의 진화를 다루면서 고래와 돼지가 가까운 관계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고래와 돼지 모두 발굽동물 (유제류) 중에서 발굽의 개수가 짝수인 우제류(artiodactyl)에 속한다. 영단어인 artiodactyl 도 어렵고 한국어에서 쓰는 우제류도 어려운 단어라서.. 영어쪽에서는 even-toed ungulate 라고도 쓰는 것 같은데 한국어도 우제류 대신 쌍발굽동물 정도로 쓰면 어떨까 생각을 해본다. 고래의 조상을 잘 몰라서 그냥 육상 포유류라고만 한다는 임종덕 박사의 이야기가 있는데 적어도 지금은 고래와 가장 가까운 동물이 하마라는 것이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안다. 돼지는 그보다는 조금 더 떨어져 있는 관계. 고래와 가장 가까운 육상포유류로 돼지, 하마, 낙타 등이 지목되어 왔는데, 최근에 와서는 대략 하마로 정리되는 분위기인 듯.
  • 앞부분에 니체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니체를 연구하신 분이 보더니 “이렇게 읽는 것이 니체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이긴 하지만, 모두들 그렇게 이해하고 있으면 또 틀렸다고 보기도 애매한 면이 있다”고 하셨다. 그럼 어떻게 읽어야 니체에 대한 바른 이해인가 하는 것은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잘 모르는 얘기라..;;

 

이은영 – 사이언스 라디오

스마트폰으로 트위터 타임라인을 보다가 스르르 잠들고, 눈이 뜨면 다시 밀린 타임라인을 확인하는 골수 트잉여 생활이 뭐 그리 바람직하다거나 본받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트위터를 통해 알게 된 (좀 거창하게) 세계 각지의, 나와 어느 정도 성향이 비슷한 트친들 머리 속을 들여다 보는 것만은 나름 트잉여의 특권이 아닌가 싶다. 수 년 간의 관찰과 내맘대로 검증(?)을 거쳐 마련한 나의 팔로잉 리스트에는 책과 관련된 일을 하는 트친들의 비율이 꽤 높다. (맞팔이 아닌 경우도 많으므로 그분들이 내 존재를 인지하고 있을 가능성은 비교적 낮다) 책을 많이 쓰신 저자분들, 내로라 하는 번역가분들, 출판사 사장 혹은 직원분들, 서점 관계자분들 등등. 덕분에 어떤 책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거나 잘 기억나지 않는 책 제목, 혹은 그 책의 영어 원서에 대한 정보가 알고 싶을 경우 트식인에게 물어보면 원하는 답에 더해 보너스까지 얻게 되는 사례도 종종 있었다. 어린 시절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가 아이들과 어울려 놀지는 않고 그 집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꺼내 보며 “우리 집에 책 보러 왔냐” 는 친구의 핀잔을 듣던 사람들이 다 트위터에 모여 있다는 어느 트친의 농담 같은 말이 농담만은 아닌 것도 같다.

트위터 예찬같은 이야기로 시작을 해버렸는데, [사이언스 라디오]의 저자인 이은영님 역시 트위터에서 알게 된 (트잉여답게도, 대면을 할 기회는 없었다) 출판업계 종사자 중 한 분이다. 종종 올려주시는 책의 뒷얘기, 원래 전공인 생물학과 관련된 얘기(저자 소개를 보면 알겠지만 까치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좋아하는 과학자들(높은 확률로,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과학자들)에 대한 이야기 등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리트윗에 하트까지 찍게 되곤 한다. 사이언스북스에 오래 근무하다가 최근에 회사를 옮기셨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시기에 맞추어(?) 출간된 자신의 책 두 권을 트위터에서 광고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사이언스 라디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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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일상에서 만나는 흥미로운 과학 이야기’ 라는 부제 그대로, 굉장히 다양한 측면에서 평소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과학의 눈으로 보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는가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트위터에서도 조금씩 이야기를 풀어놓곤 하셨는데, 열심히 준비해서 책을 내신 것을 보니 역시 내 트친들은 훌륭하신 분이 많아! 하고 뜬금없는 자부심..을 느낄 이유는 별로 없겠지.;;

책, 아니 이 ‘라디오’는 다섯 개의 ‘채널’로 나뉘어 있고 각 ‘채널’은 다섯 개에서 여섯 개의 꼭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 두꺼운 책이 아니기 때문에 각 꼭지는 대략 6-7쪽 정도의 길이. 역시 그리 긴 양은 아니고, 하나하나의 주제에 대해 깊이있게 파고 들어갈 수 있는 분량이 되지는 않는다. 가볍게 읽으면서 ‘아 그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었군’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정도. 양면이 존재하는데, 좀 더 깊이 있는 지식, 자세한 연구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나같은 독자들에게 하나하나의 꼭지들은 확실히 아쉽다는 느낌을 많이 준다. 하지만 책 전체가 다루고 있는 주제의 다양성과, 평소에 전혀 인지하거나 생각해보지 못했던 주제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생각하면 시야를 확장시켜주는 책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 책이 노리는 독자층은 청소년이거나 (책 전체가 경어체로 쓰여진 것을 보면 왠지 그럴 것 같다) 이제 막 과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독자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다양한 분야의 과학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달한다는 책의 목적에 잘 들어맞게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각종 그림과 사진도 풍부하게 제공하고 있다.

재미있게 읽은 이야기를 몇 개 소개하자면, 고양이를 잘 아는 사람은 절대 꿈도 꾸지 않았을 야심찬 프로젝트 ‘스파이 고양이, 세상을 구하라’, 반 고흐의 그림을 보고 그것이 정확히 몇 년 몇 월 며칠의 풍경을 그린 것인지, 그림에 보이는 것이 해인지 달인지를 알아내는 ‘반 고흐의 흔적을 찾아서’, 언제 들어도 기묘한, 뇌의 이상과 관련된 이야기 ‘어제가 없는 남자’, 그리고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연구에 직접 참여도 하는 ‘제임스 카메론의 심해 탐사’ 정도. 다른 이야기들도 물론 흥미로운 것이 많다.

한편으로… 살짝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되는 부분도 몇 있었는데:

  • p.32: 고양이를 훈련해 스파이로 활용하려던 계획이 전혀 실용적이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며 고백하고 있으니까요. ->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며’와 ‘고백하고 있다’가 같이 나오는 것이 동어반복적인 느낌? 앞의 구문 내용이 실질적인 고백이기 때문에 보통은 이런 경우 ‘~~했다며 한숨을 쉬었다’ 는 식으로 다른 행동 등을 묘사하는 것이 낫지 않나 싶은데..
  • p.78: 주로 거위나 까마귀의 깃털로 만든 깃펜은 정교한 필체를 자랑하여 -> 깃펜이 필체를 자랑한다는 표현은 좀 이상하다. 정교한 필체를 가능하게 해주어 사랑 받았다는 표현이 더 좋지 않을까.
  • p.219: 암성형 행성(수성, 금성, 지구, 화성) -> 암석형 행성의 오기로 보인다.
  • p.219: 카이퍼 벨트(kuiper belt) -> k가 소문자로 되어 있는데 대문자로 표기해야 하지 않을지?
  • p.221: 브론토사우루스Brontosaurus -> 영문 학명은 이탤릭체로 표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각주의 아파토사우루스도 마찬가지.

이은영님이 트위터에서 [사이언스 라디오]와 같이 광고하시던 번역서 [죽이는 화학]은 아직 다 읽지는 못했으나 상당히 흥미로와 보였다. 추리소설 좋아하는 여친님이 매우 재미있게 읽으셨다고.

자전거 국토종주 #0

언제부터인지 자전거 국토종주를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만 막연히 하다가, 이번 여름 동해안 자전거길을 달리면서 조금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보았다. 아라서해갑문에서 낙동강하구둑까지 633km. 구글 검색을 통해 정확한 코스를 확인하고 종주기가 올라와 있는 여러 블로그들을 탐독한 결과 주말을 끼고 2박3일 코스로 달리면 될 것 같았다. 종주 기록은 앱을 이용할 수도 있다지만 곳곳에 있는 인증센터에서 스탬프를 찍어 수첩에 물리적인 기록을 남기는 것이 역시 좋아보였고. 텐트를 가지고 가서 야영을 할까 생각도 했으나 처음 시도에서는 무리라는 결론.

일단 수첩이 필요해서 어제 (2016년 9월 19일) 점심에 아라서해갑문까지 다녀왔다. 집에서 36km 조금넘는 거리. 오후에 분당에 가야 했기 때문에 발바닥에 불이 나게 페달을 밟았다. 짐이 없으니 자전거는 가벼웠고 평지에서는 40km/h 까지 속도를 낼 수 있었다. 11:50am 경에 출발했고 1시간 30분 정도 걸려 도착. 수첩을 구입하고 커피와 베이글을 사먹었다. 


인증센터에서 스탬프를 찍고 집으로 출발. 또 열심히 달렸다. 집에 도착해서 샤워를 하고 나와 그제서야 런키퍼를 껐다. 총 소요시간은 3시간 22분, 거리는 71.8km, 평균속도 21.28km/h. 평균속도 30km/h 가 목표인데 이래서야 면목이 없다. 가는 길은 그래도 다리에 힘이 있어서 속도를 냈는데 돌아오는 길은 맞바람이 불기도 했고 다리가 이미 지친 상태라서 속도를 내기가 힘들었다. 그란폰도는 언감생심… 어쨌든 아라서해갑문과 아라한강갑문 스탬프를 찍었으니 다음에는 여의도부터 시작하면 된다. 아니, 그래도 자전거 국토종주를 한 큐에 하려면 아라서해갑문부터 출발하는 게 나을까? 고민을 좀 해보고.

Reflectance Transformation Imaging

이 기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링크에서 찾아볼 수 있다.

http://culturalheritageimaging.org/Technologies/RTI/

8월말에 대략적인 이야기를 듣고 하나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갔다.  일단은 개인 비용을 좀 쓸 예정.

간단히 설명하면, 카메라를 반구형의 돔 위에 놓고 반구에 고르게 50 개의 조명을 위치시킨다. 조명을 하나씩만 켜서 사진을 찍는다. 그러면 50 장의 사진이, 매번 다른 곳에서 비추는 조명에 따라 피사체의 각 부분이 모두 다르게 빛을 반사한 모습으로 찍힌다. 그리고 프로그램을 돌려 사진의 픽셀 하나하나마다 표면과 수직인 벡터를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이 데이터를 이용해 3차원 모델을 재구성한다. (혹은 표면의 상세한 정보를 얻어낸다)

관건은 반구형의 돔에 조명을 고르게 분포시키고, 그 조명 하나하나를 컨트롤하고, 그에 맞추어 사진을 찍고, 사진을 컴퓨터에 저장하는 것. 아두이노로 50 개의 조명을 제어해야 할테고, 사진을 찍는 것은 수동으로 할 수도 있다. 최종적인 모습은 아마도 라즈베리파이에서 웹서버를 돌려 요청이 들어오면 조명을 제어해 라즈베리파이용 카메라로 사진 50장을 촤라락 찍고 압축해서 파일 하나로 내려주는 형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엘레파츠 (http://eleparts.co.kr) 에서 아두이노와 LED 등을, 옥션에서 아크릴 반구를 구입. LED 는 한참 들여다보다가 JLED (http://cafe.naver.com/lazydigital) 를 구입하기로 했다. petapixel 의 글 (http://petapixel.com/2016/04/21/shoot-super-detailed-macro-photographs-rti-camera-rig/) 에서는 Adafruit 의 LED matrix 컨트롤보드를 썼는데, JLED 가 단순한 제어를 하기에는 더 편할 것 같고, 배선도 일렬로 그냥 주욱 해주면 되니까 간단할 듯.

JLED 의 제품은 직렬로 연결한 상태에서 데이타를 던져주면 앞에 있는 LED 부터 3바이트씩 잘라서 그걸 RGB (GRB?) 값으로 쓰고 나머지는 다음 LED 로 넘긴다. 즉, 5 개의 LED 가 연결되어 있으면 [000000][FFFFFF][000000][000000][000000] 이런 데이터를 전송해주면 두번째 LED 만 불이 켜지고 나머지는 꺼지는 시스템. 16백만 컬러를 표현할 수 있다는데 RTI 에는 On/Off 만 있으면 되기 때문에 우도살계인 셈이다. 하지만 작업하기에는 편할 것 같아서.. 원가를 절감해야 할 필요가 있으면 페타픽셀의 글처럼 컨트롤러를 따로 쓰고 싼 LED 에 가로세로 전선을 얽어야지 뭐. 아, 그러고보니 인두 및 관련부품들도 주문했는데 JLED 를 쓰면 인두와 빵판과 빵판용 케이블도 필요 없을 듯? 아크릴 반구를 일단 주문했는데 제대로 하려면 페타픽셀에 있는 3D 모델을 좀 수정해서 커스텀 반구를 출력해 써야 할 것 같고.

필요한 건 다 주문한 것 같은데.. 배송은 추석연휴 끝나야 오겠지. 그럼 내일은 뭘 한다..?

왕의 퇴위

축구선수들이 은퇴할 때 영어로 hang up one’s boots 란 표현을 쓴다. 더 이상 신을 일이 없어진 자신의 축구화를 벽에 걸어둔다는 의미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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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를 그만 두는 것은 아니고, 신어본 몇몇 축구화 중 가장 마음에 들어 열심히 신었던 축구화인 푸마 킹 King 한 켤레를 이제 떠나보내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서 써본다.

푸마의 킹은 무척 오래된 라인이라고 한다. 1958년에 처음 만들어졌고, 1966년 영국 월드컵에서 포르투갈의 이우제비우(Eusebio)가 신었다. 월드컵 본선에서 이탈리아를 1:0 으로 꺾으며 파란을 일으켰던 북한을 상대로 네 골을 넣으며 포르투갈이 북한을 5:3 으로 이기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이우제비우가 바로 킹을 신고 그 골들을 만들어냈다는 이야기.

어릴 때는 뭘 하든 신발은 운동화 하나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나이가 들면서 회사 가려면 구두가 필요하고 산에 가려면 등산화가 필요하고 공을 차려면 축구화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냥 폼잡을려고 특수 목적의 신발을 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신발이 필요해서 신는다는 것을 어릴 때는 잘 못 느꼈던 것이다.

30대 중반에 공을 정기적으로 차기 시작하면서 축구화를 직접 구입해보니 수많은 고려사항들이 있었다. 기본적으로는, 일단 제일 가격이 낮은 라인은 피하고, 그 위의 제품들 중에서 어느 순간 세일을 많이 하는 브랜드의 제품을 살펴보고 가격대가 적당하면 구입한다는 정도의 원칙이 있었다. 모든 요구사항을 만족시키는 신발이 있을 리는 당연히 없고, 이번엔 이걸 사보고, 한동안 그 신발에 만족해 신다가 다른 신발이 눈에 띄면 그걸 사서 쟁여두고… 축구화를 몇 켤레 구입하면서 구두를 좋아하는 여자분들의 마음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달까. 구두와 크게 다른 점이라면 축구화는 제일 비싼 나이키 수퍼플라이의 최고가 모델을 사도 고작(?) 50만원 정도밖에 안 한다는 것?

솔직히 여러 축구화 메이커들에서 주장하는, ‘기능성’ 은 존재하는지 어떤지 내 수준에서는 모르겠고, 신었을 때 발이 편한가, 디자인은 예쁜가, 가격은 적당한 수준인가 정도가 판단기준이었다. 킹은 두루두루 적당한 수준이었던 것 같다. 이것도 킹이라는 제품명은 유지하면서 매년 조금씩 디자인이 달라지는데, 이월상품을 많이 할인해줄 때 샀던 걸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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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신다 보니 왼쪽 발볼 쪽이 터졌다. 마음에 드는 축구화라 그냥 버리긴 아까웠다. 이리저리 찾아봤더니 신발을 수리해주는 가게가 동네에 있긴 했지만 보나마나 너무 비쌀 것이 분명했다. 아마존에서 신발수리용으로 파는 접착제가 있길래 그걸 구입해다가 직접 손을 봤다. 다른 곳도 터질 것 같으면 접착제를 적당히 발라주었고.

이렇게 한 번 손을 보고 나니 조금 더 애착이 생겨서, 그전까지 신경쓰지 않던 갑피 상태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번 뛰고 나면 흙을 깨끗이 닦아내고 가죽을 보호해주는 로션을 바르기 시작했다. 얼굴에 로션도 잘 안 바르던 인간인데… 뭐 또 그러다가 한동안 신경 안 쓰고 내버려 두다가 하기를 여러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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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살펴보니 발볼 부근이 역시나 터져 있었고, 신발 밑창의 클릿도 양쪽 모두 너덜거리고 있었다. 더 이상은 힘들겠구나 싶어 흙만 적당히 털어주고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우리집이 넓으면 벽에다 걸어줬을지도 모르겠다만.. 그럴 공간은 없구나. 미안해. 그리고 쓰레기봉투 속으로. 그렇게 나의 제 1대 푸마 킹은 퇴위했다. 마지막이 좀 비참한가?

하지만 나에게는 그 다음해엔가 사서 쟁여둔 킹이 한 켤레 더 있지. 그것도 거의 쌔삥으로.

빅히스토리 단상

1월이었나 12월이었나, 종로 알라딘 헌책방에 갔다가 빅히스토리 책을 보고 과학과 사람들의 팟캐스트에서 빅히스토리의 중요성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장대익 교수가 생각나 책을 산 것이 시작이었다.

첫 챕터 읽으면서.. 뭐야, 새로운 내용은 하나도 없잖아? 했다. 그리고 처박아 두었다가 2월 중순에서야 다시 펼쳤다. 마지막 챕터까지 읽고 나서도 감상은 똑같았다.새로운 거 하나도 없고 그냥 수박 겉핥기. 지대로 넓고 얕은 이야기들. 빅뱅으로 시작해 인류의 미래로 끝나는. 빅뱅에서 지구의 형성까지는 천문학, 지구의 형성에서 캄브리아기까지는 지질학, 캄브리아기에서 인류의 기원까지는 고생물학, 인류의 기원에서 역사의 시작까지는 인류학, 그 이후는 역사학, 경제학, 기타 각종 인문학, 그리고는 미래 이야기. 여러 학문을 주욱 이어붙인 .

데이비드 크리스천과 밥 베인의 책 빅히스토리를 그렇게 읽었다. 빅히스토리 자체가 뭔가 새로운 분야라기보다 고등학생 내지 대학생 수준에서 가져야 하는 빅뱅에서 오늘날의 인간까지 이어지는 교양 역사 강의 정도인 걸로 보인다. 빌 게이츠가 중요하다고 한 것은 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우주와 인류의 역사 전체를 보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 같다. 하지만 과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들에게는 주마간산, 수박겉핥기.

과학하고 앉아있네 팟캐스트에서 장대익 교수가 빅히스토리를 소개하면서 뭔가 대단한 것처럼 이야기를 해서 괜히 기대했다는 느낌이다. 조지형 교수처럼 기존 역사학 쪽에서 보면 관점이 크게 확장되는 것일 수 있겠지만 자연과학 쪽에서 보면 그다지 새롭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교양이라는 것에는 쌍수를 들어 동의한다. 어떻게 이 내용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할 것인가 하는 교양교육방법론으로는 매우 훌륭하고, 여러 모로 고민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빅히스토리가 독립된 연구분야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답을 하기 힘들다. 개별 학문에서 이뤄낸 성과들 외에 ‘빅히스토리’ 라는 이름으로 독자적인 연구를 한 것이 있는가, 혹은 독자적 연구를 하는 것이 가능한가. 글쎄.. 힘들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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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2016년 2월 22일), 조지형 빅히스토리 협동조합에서 주최한 빅크로스 심포지움이 있었다.

과학과 사람들이 만드는 팟캐스트에서 익히 듣던 목소리들의 주인공, 이명현, 김상욱, 윤성철, 장대익, 김범준 등등의 이름이 보여서 한 번 가서 들어보면 재미있겠다 싶었다. 빅히스토리가 독립적인 연구분야일 수 있는가? 여러 학문들의 연구결과를 전달하는 교육방법론으로는 유용하겠지만 그 이상의 무엇이 있을까? 이런 두 가지 의문을 가지고 심포지움을 들으러 갔다.

결론만 간단히 말하면, 그냥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재확인하는 자리였다. 김상욱 교수가 내 생각과 매우 비슷한 이야기를 했고, 토론 시간에 나왔던 질문에 김서형 교수가 딱히 뾰족한 답을 못하면서 내 생각을 더 굳혔다.

복잡성, 그리고 threshold 에 관련해서는 내 나름대로 생각이 좀 있긴 한데.. 빅히스토리에서 말하는 threshold 보다는 메이나드 스미스와 서트머리의 transition 개념이 현재의 인간에게는 좀 더 유용한 개념이 아닐까 생각한다.

제일 재미있었던 것은 주경철 교수의 강의였다. 명불허전.

공짜 간식과 커피를 열심히 먹고 (공짜 먹을거리에 환장하다니 대학원생이냐..) 부랴부랴 집으로 왔다. 아직 읽어야 할 책이 많다. 빅히스토리에 대해서도 서너 권 정도는 더 읽어야겠지.

다니구치 지로 – K, 시튼, 사냥개 탐정

‘신들의 봉우리’ 옆에 꽂혀있던 ‘K’ 를 집어들었다. ‘신들의 봉우리’ 의 하부 조지를 들어내 약간 변주한 것 같은 정체불명의 천재 등반가 캐릭터인 K 에 대한 이야기. ‘신들의 봉우리’ 연장선상에서 읽어볼 만하다.

시튼 (SETON) – 시이튼 동물기의 그 시튼. Seton 이라는 것은 처음 알았다. 늑대왕 로보, 어린 시튼과 맞서는 캐나다 스라소니, 그리고 샌드힐의 스태그 세 이야기를 각 한 권 씩의 만화로 그려냈다. 다니구치 지로의 그림은 매우 사실적이고 아름답다. 시튼은 19세기 후반부와 20세기 전반부를 살았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1880~90년대. 초원의 집과 대략 비슷한 시기다. 시튼이 숲속에 자신만의 오두막을 만드는 장면에서는 자연스럽게 잉갤스 씨가 떠올랐다. 몸뚱아리 하나로 (기껏해야 쇠붙이 조금) 자연과 맞서던 시대랄까? 자연주의자 (혹은 박물학자) 로 성장하는 시튼 개인의 이야기도 상당히 흥미롭다. 시튼이 영국의 도서관에서 보았던 미국 작가들 중 조류학자 ‘쿠에’ 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정황상 엘리엇 카우스 (Elliot Coues) 인 것 같다.

1권의 늑대왕 로보 이야기는 어릴 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어릴 때 기억으로는 스트리키닌이라는 독 이름, 그리고 사람 냄새를 숨기기 위해 몸에 소 피를 묻혀가며 덫을 설치하던 장면 등이 인상적이었다. 2권에서는 캐나다 스라소니가 등장하는데 살쾡이라고 번역해놓았다. 살쾡이 (leopard cat) 는 동아시아/남아시아에 서식하며 학명은 Prionailurus bengalensis. 캐나다 스라소니 (Canada lynx) 는 이름처럼 캐나다에 서식하며 학명은 Lynx canadensis. 전혀 다른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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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스라소니 (Canada lynx).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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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쾡이 (leopard cat). 위키피디아

3권은 샌드힐의 숫사슴 이야기. 높이 뛰어오르는 사슴의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

사냥개 탐정 – 미국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을 한껏 오마주한 것 같은, 잃어버린 사냥개를 찾아주는 탐정의 이야기. 1권의 맹도견 이야기도 그렇고 2권의 말 이야기도 그렇고 살짝 감동적이다. 늑대왕 로보의 연장선상에서 멋진 개 그림이 많이 나와서 개 좋아…

이것으로 나는 다니구치 지로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모두 따로 원작이 있고 이것을 다니구치 지로가 만화로 만든 것인데, 원작자들도 만화 버전을 보고 감동하지 않았을까? 다니구치 지로 전집을 전자책으로 내주면 아이패드 프로를 구입해서라도 살 의향이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