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감상을 쓴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의 작가 곽재식님의 책. 이 책 바로 전에 역시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곽재식님의 140자 소설을 읽었다. 140자의 글자수 제한이 있는 트위터에서 트윗 하나로 완결된 이야기를 만들어 보는 시도를 모아서 책으로 낸 것. 그 책도 꽤 재미있었지만 저자가 뛰어난 이야기꾼이라는 것 외에 길게 쓸만한 감상이 떠오르지는 않아서 여기에 기록만 남겨놓는다.
곽재식님의 다른 책들은 대개 SF, 혹은 그와 비슷한 분위기의 소설들인데 이 책, 로봇 공화국에서 살아남는 법은 넌픽션 쪽이다. 어린 시절 컴퓨터를 사용했던 개인의 경험과 과학기술사의 여러 이야기들,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전망이 뒤섞여 있는 교양과학서로 분류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야기는 저자의 어린시절이던 1980년대, 아버지가 사오신 IBM-XT 호환기종 컴퓨터를 처음 만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내 경우 국민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컴퓨터를 만져봤는데, 몇 년 차이는 나겠지만 저자의 경험과 비슷한 기억이 있어 책의 첫 부분을 매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중년 트잉여의 아재감성을 자극하는 한 마디가 있었으니, 바로 전격Z작전 데이비드 핫셀호프의 대사, “가자, 키트.” 였다. 맥가이버와 전격Z작전과 에어울프와…
컴퓨터 게임을 만들어 보려던 저자의 노력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고, 이야기는 요제프 바이첸바움과 엘리자, 컴퓨터의 초기 역사, 튜링테스트 등으로 이어진다. 인공지능이라고 하는 것의 역사가 생각보다 길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20세기 중반 사람을 능가하는 인공지능이 곧 등장하리라던 낙관적인 전망이 물거품이 된 후, ‘인공지능 겨울’을 거쳐 21세기가 되자 기계학습이라는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 무슨 영웅서사 같기도 하다. 스타워즈 에피소드 4, 5, 6 정도에 해당하는?
잠시 책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인공지능에 대한 내 생각. 인공지능이 화제로 떠오른 가장 큰 계기는 작년 초에 있었던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일 것이다. 나는 처음에 이세돌이 이기리라는 전망에 동의하고 있었는데, 1국, 2국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생각을 바꿨다. 바둑에서 컴퓨터가 사람을 이길 수 없으리라던 예전의 생각은 바둑에서 모든 경우의 수를 따지려면 컴퓨터로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은 모든 수를 다 계산하지 않고 이미 알려진 여러 수순들과 바둑판의 형세를 (어떻게인지는 잘 모르지만) 판단하여 상황에 맞는 수를 둘 수 있는, 뛰어난 존재라는 이야기. 그런데 그 인간의 판단력에 대해 좀 고민해 보면, 인간의 모든 속성이 그렇듯이 지구 상의 다른 생명들과 마찬가지로 진화를 통해 만들어졌을 것이 분명하다. 바둑을 둘 수 있는 능력은 잘해봐야 진화의 부산물 정도일 테고, 본질적으로는 기억력과 시행착오를 통해 만들어진 (극히 일부 인물들은 상당부분 타고난) ‘감’을 이용할 것이라 생각된다. 바둑의 심오함..이라든가 인간 두뇌의 탁월함..같은 건 그냥 우리가 모르는 경우의 수가 겁나게 많다는 사실을 마치 인간이 뛰어난 것처럼 포장하기 위해 쓰는 말인 것 같고. 결국은 계산과 예측의 반복인데, 이세돌이 그나마 알파고한테 이길 수 있었던 건 수백년 동안 인간이 시행착오로 알아낸 경우의 수와 ‘감’이 그 시점에서의 알파고보다 나은 경우도 있었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닐까. 최근 업그레이드된 알파고가 온라인 대국 사이트에서 프로 기사들을 상대로 60연승을 거두고 그만둔 것을 보면 바둑에 사용되는 계산과 예측에 있어서는 2016년을 기해 인간보다 인공지능이 더 능숙하게 되었다고 결론내려도 될 것 같다. 바둑, 그리고 그 바둑을 두는 인간의 두뇌 속에 우주의 원리라든가 심오한 그 무엇이 원래부터 장착되어 있었으리라는 생각은 이제 전혀 들지 않는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책의 앞부분도 물론 재미있지만 정말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은 뒤쪽 1/3 정도다. 미래에 대한 전망, 그리고 우리는 인공지능의 대두로 인해 변화하는 사회의 모습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하는 이야기들. 기존에 많이 들을 수 있는 식상한 이야기들이 아니라 곽재식님의 날카로운 통찰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특이점에 대한 생각이라든가, ‘대 바지사장 시대’라는 말이라든가.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읽어보시길.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책장을 넘겼다.
책을 출간한 구픽이라는 출판사는 얼핏 트위터에서 본 바로 1인출판사인 것 같다. 출판계에서 일하시던 분이 독립해서 장르문학을 전문으로 내시는 것 같은데 범상치 않다. 작년에 아작이 SF를 연달아, 꾸준히 내면서 장르문학 출판계의 전면에 부상했다는 느낌? 구픽도 연달아 책들을 출간하는 기세를 보니 만만치 않아 보인다. SF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와 이거 다 사들일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는 날도 오는구나…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다.